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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 100주년… “민족주의·사회주의, 독립으로 연대”
학생 네트워크로 이뤄진 운동”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학계에서 새로운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6·10 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 임금의 인산일(장례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일으켰던 민족 독립운동으로, 1919년의 3·1 운동을 계승하는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침체된 민족 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준 것으로 여겨졌으나, 3·1 운동처럼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운동’ 또는 ‘좌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운동’ 등으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실증적 자료에 기반한 최근 연구들은 이런 관점을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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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한양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27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콜로키움에서 “6·10 만세운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한독립’ 아래 연대한 민족 협동전선이었으며, 이 연대의 경험은 다음 해인 1927년 신간회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지난 5일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자인 홍성표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학생들이 하숙집, 기숙사, 선후배 관계 같은 학연 네트워크로 만세운동을 했다고 분석했다. 홍 교수는 “6·10 만세운동은 특정 조직이나 이념의 산물로만 환원될 수 없다”며 “학생 네트워크와 상황 인식 속에서 형성된 집합 행동이자, 이후 식민지 학생운동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사회적 경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최은진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는 6·10 만세운동 시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주민들의 망곡(望哭)과 상인들의 철시, 학생들의 동맹휴학 등에 주목했다. 그는 “이 시기 각지에서 일어난 여러 운동은 민족적 상실감을 표현한 주체적인 민족운동이었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확고한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보도를 비교한 김민석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두 신문 모두 만세운동을 민족적 사건으로 이해했지만 이끌어가는 방향은 달랐다”고 했다. 그는 “동아일보가 민족 감정의 도덕적·문화적 승화를 강조했다면 조선일보는 민족 감정의 정치적 성격과 현실 운동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보다 강하게 부각했다”고 분석했다.
6·10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9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선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위한 진혼음악회가 열렸다. 10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광장 놀이마당에선 국가보훈부 주최로 제100주년 6·10 만세운동 기념식 ‘함성이 하나로, 대한을 이루다’가 개최된다.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내 천도교 중앙총부 앞마당에선 6·10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이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