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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가 삽니다
[이옥진 기자의 진심]
한센인의 벗, 소록도 슈바이처
호암상 받은 치과의사 오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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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23일, 청년 오동찬은 이불 한 채와 베개, 라디오가 든 가방 하나를 들고 소록도 땅을 밟았다. 조선대 치대를 졸업한 스물일곱 살 공중보건의는 다른 의사들이 꺼리던 그 섬을 스스로 택했다. 전남 고흥에서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가 언젠가 들려준 말 때문이었다. “소록도엔 아프고 외로운 사람이 많다.”
당시 소록도에는 한센인 15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면 가라”며 말렸다. 스치기만 해도 옮는다는 터무니 없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한센병에 대한 공포가 여전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1년만 근무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1년은 31년이 됐다. 그는 소록도에서 청춘을 보냈고,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도 그곳 주민들 곁에 있다.
오동찬(58) 국립소록도병원 의료부장은 올해 삼성 호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소록도에서 30여 년간 한센인의 곁을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는 처음엔 상을 고사했다. “의사가 한 병원에서 오래 일했다고 상 받는 법은 없다”는 이유였다. 호암상은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로, 상금이 3억원에 달한다. 왜 거절하려 했을까.
“제게 상을 준다는 건, 아직도 우리 사회에 한센 어르신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남아 있다는 뜻 같았습니다.” 3시간가량의 인터뷰 동안 그는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보다 더 열악한 시절 소록도를 지킨 의료진과 직원들이 있는데, 자신이 그들을 대표하듯 상을 받는 게 송구하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소록도 주민들에게도 미안하다고 했다. “계실 때 더 잘해 드렸어야 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더 이상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평생을 집 한 채 없이 산 그는 소록도에서 살아온 세월을 자신의 ‘욕심’이라고 했다. “우리 어르신들이 가끔 ‘오 부장은 고생만 하는데, 왜 여기 있어?’ 물어요. 그러면 ‘저는 받은 게 많아서요’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너무 즐겁게 잘 살았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향하다
-상을 준다고 할 때마다 사양하셨다고요.
“물론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내가 소록도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했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든 데서 고생하니까’ (상을) 주겠다는 건데, 저는 고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 소록도에 왔던 1995년에도 이분들(한센인)을 특수한 환자로 보지 않았어요. 그냥 동네에 사는 어르신들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수락하신 이유는.
“부끄럽지만, 상금 때문이었습니다. 그 돈이 있으면 해외 진료를 갈 수 있거든요. 공무원이라 1년에 휴가를 20일 정도 쓸 수 있는데, 그동안은 매달 50만원씩 모아 필리핀·캄보디아의 한센인 마을로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런 곳은 5만원이면 60명이 한 끼를 먹을 수가 있어요. 상금이 있으면 진료도 가고, 무료 급식도 넉넉히 도울 수 있으니까요.”
-한센인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원래는 인턴을 마친 뒤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에 지원해 언청이(구순구개열) 환자들이 많은 중국 옌볜이나 동남아로 의료 봉사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해에 코이카에서 치과의사를 뽑지 않았어요. 어딜 갈까 고민하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소록도를 1순위로 썼습니다. ‘소록도엔 의사가 없다’는 아버지 말씀이 기억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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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죠. 당시 어머님이 암 투병 중이셨는데, ‘1년만 근무하고 오겠습니다’ 했어요. 불효자식이죠. 그런데 막상 와보니 수술 환자, 입원 환자들이 끊이지 않더라고요. 하루하루 치료에 매진하다 보니 1년이 훌쩍 갔고, 그렇게 31년이 됐네요.” 1년이 지나도 아들이 오지 않자, 어머니는 불편한 몸으로 소록도를 찾았다. 한센인들을 만난 어머니는 “엄마 대하듯, 어르신들 잘 치료해드려라”란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어머니는 소록도를 다녀간 지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산부인과 빼고 모든 과를 맡은 적도 있다고요.
“부임하자마자 (타과 진료도 보는) 일반 당직을 섰습니다. 의사가 없었으니까요. 임기를 마친 공보의는 3월에 떠나고, 새 공보의는 4월에 와요. 그 공백기에는 저 혼자 모든 진료를 봐야 했죠. 구강외과 전공이어서 항생제 사용 등 기본적인 교육은 수련 과정에서 배웠어요. 그렇다고 제가 내과 전문의는 아니잖아요. 배가 아픈 환자가 오면 약을 드리고, 한 시간 동안 배를 만져주는 게 전부일 때도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소록도 주민들은 외부 병원에서 진료를 볼 수 없었거든요.”
-다른 병원에서 환자를 거부했나요?
“우리 어르신이 어느 병원 1인실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다른 환자들이 무서워한다며 꺼리는 걸 사정사정해 모셨죠. 그런데 의사도, 간호사도 병실에 와보지 않는 거예요. 저한테 상을 주겠다고 심사를 하러 오는 의사들도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았느냐’고 묻더군요. 의사들조차 한센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편견이 있는데,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한센인? ‘소록도 어르신’이라 불러주길
한센병은 나균(癩菌)에 의해 생기는 감염병이다. 피부에 반점이나 발진이 생기고, 병이 진행되면 신경 손상으로 손발 감각이 떨어지거나 마비가 올 수 있다. 손가락·발가락 등 신체의 말단부가 변형되는 경우가 많다. 손이 불편한 소록도 주민들에게 양치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각한 구강 질환을 앓는 이들이 많던 이유다.
-처음 소록도에 왔을 때 어떠셨나요.
“공보의로 온 첫날, 진료실에 아랫입술이 처진 어르신이 들어오셨어요. 저는 기뻤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겠구나.’ 실제로 그랬습니다. 고름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환자, 구강암 환자 등 매일 수술과 치료가 이어져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아랫입술 재건술을 개발하셨다고요.
“한센병 후유증 중 하나가 아랫입술이 처지는 겁니다. 손이 불편해 젓가락질도 힘든데, 입술이 처져 있으니 음식도, 물도 다 흘러내려요. 그런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안 아플 수가 있나요? 1960년대 의사들은 저작근을 묶는 방식으로 수술했는데, 그러면 입이 티스푼도 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안 벌어집니다. 저는 입술 주변에 세모난 피판을 만들고, 안쪽 지방층을 제거한 뒤 아래쪽 피부 조직을 위로 당겼습니다. 벌어진 입술이 닫히면서 음식을 흘리지 않게 됐죠. 500명 가까운 어르신이 수술을 받았어요. ‘이제 안 흘리네?’ 하며 좋아하셨어요.”
아랫입술 재건술의 소요 시간은 3시간가량. 그는 “너무 쉬운 방법인데 왜 그동안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센병은 오래된 병인데도 의료인들이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어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기 때문이겠죠. 의료인으로서 너무 죄송하더라고요. 제가 이분들 곁을 지키는 것도 그 미안함 때문인지 모릅니다. 제가 실력이 대단하거나, 사명감이 투철해서가 아니에요. 그냥 미안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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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하고, 전염성도 약하다. 한국은 1982년 세계보건기구(WHO) 한센병 퇴치 기준(인구 1만명당 1명 이하 발생)에 도달했다. 하지만 한센병에 대한 공포는 오래 남았다. 피부에 남은 후유증은 눈에 보였고, 그 모습은 괴담과 차별로 번졌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조선총독부는 고흥 소록도에 소록도자혜의원을 세우고 한센인들을 강제 수용했다. 전국에서 모인 이들은 강제 노역과 감금, 폭력에 시달렸다. 그렇게 소록도는 ‘천형(天刑)의 섬’이 됐고, 한센인들은 병마보다 지독한 편견과 싸워야 했다.
-선생님이 소록도에 오신 이후에도 차별이 심했습니까.
“어르신들이 손이 불편하시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잘 못 드시잖아요. (소록도) 밖에 나가면 짜장면 같은 걸 드시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데 2000년대 초반까지도 식당에서 아예 안 받아줬어요. 저한테는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하고 반겨도, 어르신들에겐 음식을 안 주려고 했어요. 일부러 점심시간을 피해 오전 10시 반, 11시 반에 갔는데도요.”
-지금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전엔 제가 일부러 방송에 나갔어요. ‘소록도에 사는 나도, 소록도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도 건강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치유됐다. 이제 여러분 생각 속에 있는 편견과 차별만 극복하면 된다’는 말을 하려고요. 이제는 방송에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달라졌죠. 다만 아쉬운 건 있습니다. 감기 걸렸다 나은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그냥 이름 부르잖아요. 소록도 어르신들도 전염성 없이 나은 분들이에요. 그런데도 한센병 환자, 한센병 병력자, 한센인이라고 부르죠. 그분들을 소록도 주민, 소록도 어르신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이분들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지금의 소록도는 어떤 곳입니까.
“평균 연령 79.9세, 315명의 어르신들이 평안한 삶을 누리는 조용한 어촌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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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 필요한 지원을 묻자 그는 단번에 “의료진”을 꼽았다. “특히 내과·가정의학과·안과 전문의가 꼭 필요합니다.” 현재 국립소록도병원에는 전문의(치과·외과·피부과) 3명과 공중보건의 4명이 근무 중이다.
-남다른 사명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그것도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섬에 노인성 질환을 앓는 어르신들이 있으니, 가서 진료해야겠다’ 정도면 충분합니다. 저처럼 젊을 때 올 필요도 없어요. 많은 분이 저한테 ‘헌신했다’고 하시는데, 전혀 아닙니다. 헌신이란 말은 무보수로 이국땅에서 환자들을 돌본 마리안느·마가렛 수녀님 같은 분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에요(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인 두 수녀는 소록도에서 40여년간 봉사했다). 저는 공무원이자 의사로서 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게 무슨 헌신입니까.”
-후배 의료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의료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를 봐야 한다는 것. 환자가 있는 곳을 기피하지 말고,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다시 돌아가도 내 선택은 같을 것
그는 아내 이승희(56)씨를 소록도에서 만났다. 그보다 몇 해 앞서 소록도에 와 간호사로 일하던 이씨가 환자들을 살뜰히 대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갔다. 두 사람은 구강암을 앓던 윤모 할아버지를 돌보며 가까워졌다. 윤씨는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은 채 임종했다. 1997년 두 사람의 결혼식 날, 소록도 주민들은 300원, 500원, 1000원이 담긴 축의금 봉투를 내밀었다. “우리 ‘이 간(호사)’ 울리면 죽을 줄 알아!”라는 으름장과 함께였다.
그는 일이 없을 때면 스쿠터를 타고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삼겹살 구웠다”고 부르면 가서 함께 먹고, “고구마튀김 가져가라”고 하면 받아온다. 믹스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의 취미다.
-‘소록도에 있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요.
“어르신들이 저를 의사로 대하지 않을 때. 아들로, 가족으로 여겨주실 때 의사로서 성공했다고 느낍니다. 환자가 인정하는 의사가 가장 행복한 의사 아닐까요? 한 번은 타지에서 손님이 와서 ‘내 후임으로 올 의사’라고 장난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들은 어르신이 펑펑 우시더라고요. 그 뒤론 그런 장난은 안 칩니다. 2년 뒤면 정년이라 소록도를 떠나야 하는데, 어르신들이 ‘나 죽을 때까지 있으면 안 돼?’ 하세요. 그래서 고민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요.
“모두 기억납니다. 한 할머니는 결혼식 때 축의금으로 3만원을 주셨어요. 그걸로 경대도 사고, 이불도 사고, 요강도 사라고 하셨어요. 그때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소록도에 들어오면 나갈 일이 없으니 물가를 전혀 모르셨던 거죠. 구강암에 걸려 대학 병원에 모시고 간 아저씨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육지를 나가본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요.
“어르신들이 외로워할 때. 저는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컸고, 지금도 가족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는 ‘아재 개그’ 마니아였다. 어르신들이 좀처럼 웃지 않아서 농담거리를 수집했다고 했다. 어떤 농담이냐고 묻자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가장 뜨거운 과일이 뭔지 아세요? 천도복숭아! 이런 얘기 하면서 함께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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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받은 상금을 기부하거나 해외 진료에 쓰셨죠. 개인적으로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나요.
“2014년에 성천상 상금으로 1억원을 받게 됐어요. 아내에게 ‘정장 한 벌 사줄까?’ 했더니, 아내가 ‘그게 당신 돈이에요?’ 하더군요.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그때 냉장고며 세탁기며 다 낡았었거든요. ‘가전을 싹 바꿀까?’ 했더니 큰딸이 ‘아빠, 큰돈 생기면 아프리카로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를 위해 돈을 쓰면 아빠는 나쁜 사람이에요’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중2였던 둘째는 유럽 여행을 가자고 했는데, 결국 기부하기로 결정이 나니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문을 쾅 닫고 방에 들어가더라고요. 하하.”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남이 아플 때 아파하고, 남이 기쁠 때 기뻐해 주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했어요. 큰딸이 열 살 무렵, 다른 애들처럼 좋은 집에 살고 싶고 학원도 다니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어요. 1년만 더 있다가 소록도를 떠나자고 약속했는데, 1년 뒤에 딸들이 ‘우리가 떠나면 (소록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떻게 하느냐’더군요.” 그의 두 딸은 학원 한 번 간 적이 없다. “국가고시 합격한 학교 선생님들에게 배우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차로 두 딸을 뭍(녹동)으로 통학시켰다. 현재 큰딸은 한의사 인턴으로 수련 중이고, 작은딸은 의대 본과 4학년이다.
그는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제 욕심에 소록도에서 한평생 살았는데, ‘가족이 힘들었겠구나’란 생각이 들어요. 해외 봉사 갈 때마다 따라와 도와준 아내와 딸들에게 고맙고 미안할 뿐이죠.”
―꿈은 무엇인가요.
“평생 스트레스를 받고 산 우리 어르신들이 동요 없이 평안한 삶을 사시다가 천국 가시는 걸 가장 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퇴직 뒤 아내와 필리핀에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쓰레기섬에 가서 살고 싶어요. 제가 소록도에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열악한 곳이거든요. 그런데 아내는 경기도나 충청도에 작은 집을 마련해서 가끔 지하철 타고 서울 구경 가는 삶은 어떠냐고 하더군요. 좀 더 고민해 봐야죠.”
그는 23평짜리 관사에서 살고 있다. 정기적금 외에는 투자해 본 적도 없다. 결혼반지는 금 모으기 운동 때 냈고, 청와대 시계 같은 선물은 필리핀 한센인 마을로 보냈다. 휴대전화는 딸이 쓰던 것을 8년째 쓰고, 뒤축이 다 닳은 신발을 20년 넘게 신고 있다. 그가 한 달에 개인적으로 쓰는 용돈은 5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저는 이득 보는 게 싫습니다. 왜 꼭 이득을 봐야 합니까? 좀 손해 보면서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죽는데, 이득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소록도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는 걸 보면서 죽음에 초연해졌달까요. 사람은 다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요. 오늘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합니다.”
그는 1995년으로 돌아가도 소록도행을 택하겠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 “내 이야기는 안 써도 좋으니, 이 말만은 써달라”고 했다. “소록도를 특별한 곳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의사들이 안 오는 것 같아요. 다달이 월급 받으면서,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 진료하면서 사는 거예요. 내과·가정의학과·안과 선생님이 꼭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